성경 / 데살로니가전서 2:1-12
제목 / 십자가 복음 = 두려움을 이긴다.
얼마동안 비가 오질 않아 많이 건조하고 감기 몸살 바이러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몸은 따듯하게 청결을 유지하고 건강하게 생활하시길 축복합니다.
십자가(복음)의 아픔을 경험한 사람은 두려움을 이깁니다.
사도 바울의 관심은 복음밖에 없었습니다.
복음만이 삶의 가치를 알려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1절).
데살로니가전서 2: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고난과 능욕을 당하더라도 복음이 전해지는 것에만 전념했습니다(2절).
데살로니가전서 2: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간사함이나 부정, 속임수를 쓰지도 않았습니다(3절).
데살로니가전서 2:3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왜 ??? = 그 전하는 것이 생명의 복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애를 썼습니다.
진실함으로 사역을 감당했던 모든 이유의 뿌리에는 복음이 있었습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나님의 아픔과 사랑을 느끼는 사람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아픔을 느낀 사람은 세상이 주는 모든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1. 십자가의 아픔을 느끼면 두려움을 이깁니다.
죄를 지으며 살고 싶거나 믿음을 저버리고 타협하며 살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두려움에 빠지면 옳은 소리일지라도 들리지 않습니다.
술자리의 압박, 믿는 자라는 것을 알렸을 때의 피해, 왕따의 위협 등의 뿌리는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에 빠지면 알아도 하지 못합니다.
시험 보는 학생이 알아도 풀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두려움에 빠진 사람에게는 무엇을 가르쳐 주기보다는 아무 조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확신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본 후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변하였습니다.
권능과 기적을 보여 주었을 때도 숨던 그들이 십자가 사건 이후에 담대하게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요 19:38).
요한복음 19: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십자가의 아픔을 느꼈기에 두려움을 뛰어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사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아픔을 본 사람은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히고, 떼를 지어 죽이겠다고 달려는 깡패들의 위협이 있었음에도 하나님의 아픔을 알았기에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오순절 사건을 보면 마가의 다락방에서 문 잠그고 기도할 정도로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성령의 임재 이후에 담대히 만천하가 알아듣도록 복음 증거했습니다(행 2:36).
사도행전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2. 소유보다 아픔을 느끼기에 힘써야 합니다.
성도가 추구할 바는 소유보다 아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많이 갖추고, 형통하고, 건강보다 십자가 아픔을 깊이 느낄 줄 아는 것이 성도입니다.
◈ 아브라함과 롯이 소유가 많을 때에 오히려 평화로운 공조가 힘들었습니다.
땅이 좁아서 헤어진 것이 아니라 소유가 너무 많아서 공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까지 이주하며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갈등이 생겼습니다.
재벌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 소유가 많기 때문에 갈등이 생겨서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로또에 당첨된 후에 형제 다툼과 가정 불화 등은 비일비재한 사건들입니다.
진정한 하나 됨은 아픔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강점은 소유보다 아픔을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어른 됨은 먼저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진정한 선생과 주가 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룻에게 선택권을 넘겨주었습니다. ‘좌’ 하면 ‘우’ 하고, ‘우’ 하면 ‘좌’ 하였습니다.
손해 보는 일은 힘 있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일입니다.
아브라함도 생명의 위협을 받고 부인을 누이라고 속이고 회개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나를 지키는 것이 나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경험했기에 손해 볼 수 있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크리스천이 손해 볼 줄 모르고 악랄하고, 지독하게 이기려고 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을 믿는 자는 손해 볼 줄 압니다.
하나님의 아픔을 이해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자는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해줄 수 있습니다.
용서해 주는 사람의 아픔을 이해한 사람은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습니다.
◈ 아브라함과 롯은 그 중심에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제단 중심의 인생이었기에 잘못된 길로 가도 다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말씀이 중요했습니다. 반면, 롯은 장막 중심의 인생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아파트, 돈 중심의 인생입니다.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여도 장막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지만, 롯은 믿음의 대열에서 버림받은 바 되었습니다.
시작을 제단 중심적으로 사는 사람은 끝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픔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가 천만 원 정도 사기 치고 도망갔다면 그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어떻게 모은 돈인데…” 하지 않겠습니까.
한달 내내 자신의 글에 악플을 다는 사람을 만난다면 죽이고 싶을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빚을 탕감 받은 은혜를 체험한 자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아픔을 깨닫는 순간 모두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53:5을 다시 읽으면 “그가 찔림은 나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나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나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나는 나음을 받았도다”
그렇게 허물 좌악으로부터 용서 받은 나는 또 다른이를 용서 할수 있습니다.
아픔을 이해한 용서가 두려움을 이기고, 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삶의 큰 무기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단 중심의 인생을 통하여 주신 것도 감사, 주시지 않은 것도 감사하게 하심에 감사하며 살아갑시다.
십자가의 아픔을 전심으로 받아들임으로 모든 두려움을 물리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며 살아갑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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