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요한 복음 16장
제목/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철학자 야스퍼스는 싸움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한계상황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원치는 않지만 부득불 싸워가며 살 수 밖에 없는 그러한
숙명적 존재라는 말입니다.
첫째는 자연과 더불어 싸웁니다. 폭설과 한파와 싸워야 하고, 홍수와 태풍과도 싸워야 하고, 때로는 가뭄과도 싸우고, 수많은 재난 사건들과
싸워야 합니다.
또 사람끼리 싸웁니다. 총소리가 들리지는 않지만 얼마나 무서운 싸움을 하고 있습니까? 경제와 정치, 그리고 사회 속에서
우리는 무한경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얼마나 힘들면 자살까지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무엇보다 자기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싸웁니다. 죄와 정욕과 욕심과 특별히 시기, 질투, 아주 못된 마음 이런 것들과 싸웁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싸움도 결국 영생을 위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육신 때문에, 권세 때문에 싸운다면 결국은 이 싸움에서 이겨도 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비록 육신의 싸움에서 져도 영원한 싸움에서 이길 수 있도록 고난 앞에서, 시련과 핍박 앞에서 실족하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실족하지 않도록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죽음이라는 실패의
자리로 가시지만 그 실패는 영원한 실패가 아니라 성공과 영생을 위한 일시적인 실패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제자들을 죽이면서 그것이 곧 자신들의 성공이며 그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으로 알고,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의 고난에 대해서 세상적인 관점이 아니라 영적인 관점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첫째, 고난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16절에,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는 말씀대로 주님의 고난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로 가는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고난은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는 불가피한
과정이었습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고통은 죄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 죄가 해결되지 않으면 결코 슬픔과 고통은 치유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께서 인간이 받아야 할 모든 고통과 슬픔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으로
죽으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살리심으로 다시 사셔서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고난은 죽음이 아니라 영생으로의
시작이라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고난은 잠시 슬픔을 가져 왔지만 영원한 기쁨을 주는 사건입니다.
20절에 보면,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1절에서 주님은 이 고통을 여인의 해산의
고통에 비유하셨습니다. 새나라 새 백성을 탄생시키기 위해서 주님께서 해산의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 고통은 잠시일 뿐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제자들에게 더 큰 기쁨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2절).
하지만 이 좋은 것이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좋은 것을 얻기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24절에,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한 것을 이미 다 이루셨고, 또 그것을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그것을 당신의 백성에게 주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제자들까지도 모두다 유대교의 기도 형식대로 규범화된
율법적 형식에 따른 기도만 했을 뿐 마음을 울리는 살아있는 기도는 하지 못한 것입니다.
기도를 해도 멀리 계시는 분에게 하듯 형식적으로
했고 공동으로 기도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해서 하나님께 직접 어떤 것을 받는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제부터는 내 이름으로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우선,
지금까지 조상들이 기도했던 대상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죄를 사해주신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할 수
있는 이유도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주님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도하고 구할 때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구해야만 합니다.
육신을 위한 것들만 구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만나처럼 구하여 얻고 또 얻어도 배고픈 것입니다. 쌓아 놓아도 불안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하면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24절).
또 하나는 보혜사 성령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달리 해석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닙니다. 꼭 하나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구할 것을 말씀하신 것은 이제 주님께서 잡히실 시간이
다가오고 그러면 곧 제자들도 흩어질 것이기 때문에 보혜사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고난이 와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33).
오늘도 우리는 세상 가운데 있습니다. 영적인 전쟁터에 서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여러분도 성령님을 구하셔야 합니다. 성령의 도움을 통해서만 이 세상에서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음을 기억하시고 무엇보다 사순절 기간에 성령충만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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