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씀 묵 상/새벽 묵상

제자의 배신 (마태복음 26:47-50)

로뎀의 엘리야 2012. 4. 2. 11:49

 

     

    제자의 배신 (마태복음 26:47-50)

     

    우리는 본문에서 야비함의 극치를 내달리고 있는 「가룟 유다」를 봅니다.

    예수님은 유다와 사제의 연을 맺으셨지만, 유다는 예수님과 원수의 연을 맺고 맙니다.

    유다」는 처음 예수님의 동반자로 시작합니다.

    주님과 함께 다니면서 먹고 마시고 자고 쉬는 것을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예수님과의 동행의 관계를 배신의 관계로 파기합니다.

    그리고 그만큼에서 끝내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을 인신매매하고, 그것도 모자라 적들의 앞잡이가 되어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것입니다.

    유다의 뻔뻔한 모습은 본문에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잡는 무리를 끌고 와서는 예수님께 안부를 묻더니,

    잡아도 좋다는 표시로 예수님께 입을 맞춥니다.

    입맞춤으로 사랑을 팔아버리는 치가 떨리는 장면입니다.

    위선도 이런 위선이 없습니다. 야비함도 이런 야비함이 어디 있습니까?

    야비하다는 말로는 잡스러운 유다의 모습이 다 담아지지 않습니다.

    더 이상 잔인할 수 없는 모습으로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사람이 사악해져도

    이렇게 사악해질 수 있는가’를 묻게 하는 장면입니다.

    ◉ 도대체 「유다」는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유다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팔려는 궤계를 가지고

    제자로 위장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유다도 좋은 제자가 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돈궤를 맡을 만큼 예수님의 신뢰를 얻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유다는 어디서부터 무엇 때문에 잘못된 것입니까?

     

    「유다」는 처음부터 예수님 밖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유다의 배신의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 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6절 하반절을 보면 유다가 품었던 탐욕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유다」가 돈궤를 맡은 것이 잘못이 아닙니다.

    어떤 모임이든지 그 모임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물질이 필요한 것이고,

    그렇다면 재정을 담당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돈은 내 것이 아니기에 절대로 탐하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재정을 담당하고는 그것을 빼내어 썼습니다.

    물론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왕위에 앉으시면 한 자리씩 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으니 돈이냐 권력이냐 하는 것만 다를 뿐이지

    그 또한 탐욕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비슷한 것 같지만 아주 다른 사안입니다.

    적어도 다른 제자들은 권력이나 명예욕을 가지고 있었다해도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 또 왕이 되신 예수님 안에서

    누리려는 권력이요 명예였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좀 더 높은 자리에 앉고 싶었던 이유도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께 더 긴밀한 제자가 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지 적어도 예수님 없이 누리는

    높은 자리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달랐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도대체 유다에게 왜 돈이 필요한 것입니까?

    예수님과 제자들은 함께 자고 함께 먹고 함께 다니는 완전한 공동체였습니다.

    돈이 필요하다면 함께 쓸 돈이 필요한 것이지

    개인적인 돈이 따로 필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공금을 횡령해서 개인적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미 유다가 예수님을 벗어났다는 말이 됩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예수님 없이

    예수님이 모르시는 일을 따로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유다가 예수님을 팔게 된 원인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지 않고 땅의 왕이 되셨다면

    유다는 왕권에 도전하여 반역을 일으키고도 남았을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유다는 사단의 수하였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잡으려는

    무리와 함께 와서 미리 정한 신호대로 입을 맞출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유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50절)

    예수님은 지금 자신을 배신하고

    헐값에 팔아 넘기는 유다를 향하여 ‘친구’라 부르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다를 지칭하신 ‘친구’라는 말은 헬라어로

    “헤타이테”인데, 이 말은 ‘이해 관계로 맺어진 동료나 친구’를 말합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사랑과 애정으로 맺어진 친구는 “필로스”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유다와의 관계를 “헤타이테”로 표현하면서

    ‘유다가 더 이상 사랑과 우정의 울타리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다의 비극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유다보다 결코 낫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자신을 살펴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것은

    ‘내가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원하고 바라는 목적들이 예수님 밖의 것들을 지향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도 유다같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였으면서도 그 모양이 되고 말았는데,

    우리 인들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은 유다라는 거울에 저마다 자신을 비추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추어보고, 예수님만을 나의 목적으로 삼을 것을 고백하는

    귀한 새벽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 멘 -

     

                     = 2012년 4월 2일 새벽기도회 설교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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