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통의 터널 ◈
예레미야애가 3:5-6
“고통과 수고를 쌓아 나를 에우셨으며 나를 어둠 속에 살게 하시기를 죽은 지 오랜 자 같게 하셨도다”
우리는 슬픔이나 고통을 성경구절 한 두 개나 그럴 듯한 말 몇 마디로 쫓아 버리거나 녹여 버릴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슬픔은 피해야 할 무엇이 아닙니다.
한번 고통을 당하면 슬픔은 피할 수 없습니다.
슬픔은 터널과 같은 것입니다.
일단 터널 속에 들어가면 그 터널을 통과해야 합니다.
슬픔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통과해야 할 고통의 터널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필요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물에 빠지면 “몸은 가라앉고 입만 뜬다” 는 잡초성 속담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말에 행동이 따르지 못함에 온 뼈아픈 지적일 것입니다.
저 역시 고통의 긴 터널을 통과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신앙의 벗들이 제 주변에서 훈계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것은 고통에 고통을 더해 주는 무거운 암흑의 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교훈 삼아 과거를 재점검하게 해 주고 그 고통에 대한 원인분석을 냉철하게 해 주고 그리고 지금의 고통 당하는 나의 자세에 대해 쉼 없는 교훈의 무거운 짐을 안겨 주었습니다.
고통의 터널에서 뼈 속 깊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작은 삶을 통하여 그렇게 살아가려 땀흘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 당하는 자와 함께 울어 주는 것입니다.
그 고통의 이유를 묻지 않는 것입니다.
그 고통에 대한 어떤 훈계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그와 함께, 그 아픔에 동참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천하기는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물질이 필요한 것이고
시간이 필요한 것이고
함께 있어주고, 기다려줘야 하는 인내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강도 만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때는 그 사람이 강도 만난 이유에 초점을 맞추어 그 말씀을 활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이 강도 만난 이유를 묻는 것이 아니라 강도 만나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라는 것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 앉혀 놓고 공자왈, 맹자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고 그 사람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 주라는 것입니다.
세상엔 말이 너무도 많습니다.
세상엔 훈계가 너무도 많습니다.
아 ! 그러나
세상엔 함께 울어줄,
함께 웃어줄, 그러한 벗들과 위로 자는 줄어들고 있습니다.
세상아
세상아
내가 널 위해 울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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