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씀 묵 상/새벽 묵상

십자가의 능력 (요한복음 19:38-42)

로뎀의 엘리야 2012. 5. 10. 09:20

 

     

    십자가의 능력 (요한복음 19:38-42)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셨을 때,

    사단에게 사로잡혀 있던 유대의 지도자들은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났고,

    앞으로는 이와 같은 일로 골치 아플 일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이러한 예수의 대적자들의 생각을 여지없이

    허물어트리는 최초의 사건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과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닮은 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둘 다 「산헤드린」의 회원이었고, 부자였으며, 숨어서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를 따르긴 따르되 자신들이 가진 재물이나 권력을 포기하지 않고,

    단지 좋은 가르침을 받는데 만족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지적인 만족을 얻는데 그치는 사람들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감명을 받고 지적으로는 동의하기는 하나 전폭적으로

    잘못된 생활을 청산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예수님이 잡히시고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까지

    그들에 대한 언급이 성경에 전혀 없다는데 있습니다.

    산헤드린의 회원이었던 그들이 예수님의 문제를 심의하는 산헤드린에서

    확실하게 예수님을 변호하고 편들었더라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오늘 성경이 간접적으로나마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38절上)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39절上)

    은휘하고(숨기고) 밤에 나아올 정도로 그들은 예수를 믿는 대가로 치르게 될

    여러 가지 문제들을 꺼려했다는 점을 성경이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그들의 태도가 십자가상의 사건을

    기점으로 해서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요셉」은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했고,

    「니고데모」는 왕들의 장례 때에나 쓰는 ‘몰약’‘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이나 가지고 왔습니다.

    특히, 「아리마대 요셉」의 변화는 주목할만합니다.

    본문에는 그냥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요구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막15:43절上)

    당돌히’, 그것도 ‘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살아 생전에는 두려워하던 요셉이 두려움을 모르고

    대담하게 로마 정부에 예수의 시체 처리를 요구했습니다.

    비겁함과 주저함과 소심하고 타산적인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예수를 따르는 자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이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누구든지 이렇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그 능력을 믿는 자를 전혀

    다른 새사람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용기 없는 자를 용기 있는 자로, 사랑 없는 자를 사랑이 넘치는 따뜻한 사람으로,

    인색한 자를 인정이 넘치는 사람으로 바꾸는 힘이 십자가에는 있습니다.

    헌신하게 하고, 충성하게 하고, 사랑하게 하고,

    분열이 치료되고 하나로 화합하게 합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바라는 이상(理想)이 있습니다.

    조건 없이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하고 싶고,

    대의를 위해 멋지게 희생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어떻습니까?

    그 이상대로 살아집니까?

    이상이 있는가 하면 그렇게 살지 못하는 현실이 있습니다.

    생각대로 살지 못하는 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영화라는 게 있습니다.

    영화 속의 주인공을 자신과 일치시켜 대리 만족을 느끼려는 심리,

    그 주인공을 통해 현실에서는 할 수 없었고 이룰 수 없었던

    이상적인 자신의 바램과 행동을 실현시키려는 마음이

    영화를 매력 있게 느끼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것은 모두 허구가 아닙니까?

    상상의 세계에서 제아무리 욕구를 충족시키면 무엇합니까?

    현실은 변한 것이 없고, 자신은 현실 속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말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믿어야 됩니다.

    이전에는 마음으로 꿈만 꾸던 인간다운 이상적인 삶,

    정말 용기 있고 의를 위하여 마음먹은 대로 거칠 것이 없게 사는

    멋진 삶은 예수의 십자가를 믿고 변화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를 보십시오.

    십자가 사건이 있기 전, 왜 그들이라고 용기 있게 나서서

    예수를 따르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했지만, 마음만은 그러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십자가 사건이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믿는 자만이 새사람으로 변화된 삶을 살 것입니다. - 아 멘 -

     

                    = 2012년 5월 10일 새벽기도회 설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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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R:기도 3집 : 예수로나의구주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