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단강은 아무나 건너가는 강이 아니다. ♡
성도들이 별세하게 되면 부르는 찬송가가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찬송가가 있다. 죽고 난 뒤 반드시 건너가야 하는 강은 요단강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 강을 건너지 않고 천국으로 갈 수 없단 말인가? 하는 의구심을 가져 볼 필요가 있다. 율법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도약의 시대인 가나안 땅 입성을 위해 요단강을 건너가야 한다.
이스라엘의 홍해 도하작전은 도저히 세상에서 날 수 없는 멋진 장면이다. 벗어날 수 없는 세상에서 구출되기 위한 물의 세례를 상징하고 있다. 여기서 세례가 맞느냐? 침례가 맞느냐? 하는 것은 초대교회 당시 카타콤에서 지하예배생활을 하는 가운데 도저히 침례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맞이하게 된 축소된 의식으로 인해 생겨진 것이다.
역사적 문화에 의한 의식을 세례와 침례로 구분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세례와 침례를 할 수 있는 전제 하에서 본다면 세례와 침례는 하나로 여기고 서로 존중했으면 한다. 성경에 나오는 세례는 회개의 세례(막 1:4, 눅 3:3, 행 13:24, 19:4), 요한의 세례(마 21:25, 막 11:30, 눅 7:29, 20:4, 행 1:22, 10:37, 18:25, 19:3), 한 몸 안으로의 세례(고전 12:13, 엡 4:4~5, 갈 3:27), 물세례(롬 6:4, 11) 성령세례(행 1:5) 불세례(마 3:11) 고난의 세례(눅 12:50, 막 10:38, 39, 빌 1:29, 히 2:10, 3:8, 13:12, 벧전 4:1, 13, 19, ) 등 일곱 가지 세례로 분류할 수 있다.
성경을 몇 백번 몇 천 번 읽었다고 자랑하는 분에게 세례가 몇 가지인지, 부활이 몇 가지인지 여쭤보면서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만다. 그래서 성경을 얼마큼 읽었다고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또 이런 상식을 안다고 해서 성경을 많이 읽었다고 할 수 없다. 세례의 진정한 의미를 모른다면 성경을 읽은 것은 무효가 되고 만다.
베드로전서 3:21에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례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구원받은 표다. 육체의 정결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 세례의 목적이라고 한다면 세례의 의미를 새롭게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것은 단순히 애급 생활에서부터 해방도 되지만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선한 양심을 되찾은 것이라고 본다. 또한 여호수아의 인솔 하에 요단강을 건넌 것은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의 존재로 성령의 생애에 들어가기 위한 성령의 세례를 예시하고 있다.
로마서 1장에서 7장까지 삶을 요단강을 건너기 전이며 8장부터 16장까지의 삶은 요단강을 건넌 후에 얻어진 생애를 담고 있다. 따라서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는” 사건이 바로 요단강을 건너는 사건이다. (에베소서 4:22~24)
사단의 노예였던 저와 여러분은 이 두 가지 경험을 거쳐 온전한 구원에 들어가야만 한다. 홍해를 건너 구원받은 것으로만 만족해서는 안 된다. 혹독한 신앙을 거치지 않으면 요단강을 건널 수 없는 것이다. 아무나 요단강을 건너가는 것이 아니다. 장정 60만 명, 어린아이, 여성들, 노인들까지 합하면 200만 명이 넘는 인원 중에 단 두 사람만인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들어가고 나머지는 200만 명 중에서 태어난 이 세대들이 들어갔다고 한다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옛 사람은 죽고 새롭게 태어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고 언급할 수 있다.
요단강 도하작전에서는 홍해도하작전과 달리 언약궤가 먼저 앞장 서 나아가서(3:6, 11, 14) 요단강에 한 가운데 굳게 서 있는 동안, 백성들이 안심하고 건너갈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3:17) 요단강에 서 있던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의미하고 있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가 온전한 은혜의 생애에 들어가는 데는 그의 뒤를 따라서 가야만 한다. (3) 벧전 2:21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라는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기만 하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게 된다.
그는 우리들의 “믿음의 주요, 또는 이를 온전케 하시는 이시기”(히 12:2) 때문에 그는 요단강 가운데 즉, 죽음의 땅에 굳게 서 계시기 때문에 우리들도 그와 함께 죽음의 곳을 거쳐 은혜의 생애로 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요단강에 서 있는 언약궤는 예수께서 갈보리 산에 못 박혔던 십자가와 같은 형국의 장면이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노라.”는 경험을 맛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요단도하작전은 하나님께서 백성들 가운데 계시어 가나안 토착민 7족속을 이기게 하실 일의 보증이며(10) 또 하나님이 여호수아와 함께 계셔서 백성의 지도자로써 권위를 더하게 하신다는 확신을 주시는 작전이 되었다.(7) 그러므로 요단강은 아무나 건너갈 수 있는 강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건과 같은 은혜가 임해야 건너갈 수 있다.
요단강에 언약궤가 물가에 임하자마자 강 가운데로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생겨났다. 그 앞에는 그 무엇도 방해할 수 있는 것이나 저항할 수 있는 것이 나타날 수 없었다. 마귀 사탄도 막을 수 없는 길이 생겨진 것이다. 십자가로 나아가는 길에 감히 사탄과 마귀는 어떤 방해공작을 해도 멈추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요단강물이 좌우로 물러가 길을 만들어진 것은 죽음의 능력을 정복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보여줌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어떠한 곤란과 위험에 직면해도 주께서 우리의 전진하는 길을 열어주심을 보여 주시는 장면이다. 우리의 죽음은 인생의 마지막 관문이 아니라 마치 터널을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다.
사람들이 죽는다고 하는 것은 육체의 호흡이 끝나는 것으로만 여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목표에 도달한 상태를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인들의 죽음으로 인해 끝난 것이 아니라 아직도 그들의 사상이나 교훈들이 영향을 끼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아직도 많은 영혼들을 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요단강에서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물을 밟자마자 일제히 흘러가던 물이 멈추고 좌우로 갈라져 백성들이 강바닥을 밟고 건널 수가 있었던 것은 제사장들이 약속의 말씀을 지고 순종할 때 홍해가 갈라지고 요단강물이 갈라지는 것이다.(15~16) 앞에 놓인 장애물이 있다고 할지라도 구애됨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신앙의 내디딜 때만이 길이 열린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과거 홍해를 건널 때는 발걸음이 내딛기 전에 먼저 길이 열렸는데 요단 강물을 제사장이 언약궤를 매고 들어가고 난 뒤에 길이 열린 차이가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할 때 길이 열린다. 신앙이 어릴 때에는 먼저 하나님께서 먼저 능력을 보여주시지만 고무적인 신앙으로 격려하시기 위하여 신앙이 자란 자에게는 아무 것을 보지도 듣지도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걸어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모험적 신앙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길이 열리게 되어 있다.
홍해는 모세의 인솔 하에 어쩔 수없이 건너가게 되었지만 요단강은 아무나 건너가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함에 따라, 성령의 인도에 따라 순종하는 자세가 되지 않으면 건너갈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당당함으로 건너가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내 앞에 목표를 세워주시지 않으면 건널 수 없는 강이다.
많은 교회에서 요단강을 건너가야 한다고 그리고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건너가야 하고 정복해야 되는지 아주 계획적인 작전을 세우지 못한 채 건너갈 수 있다고 정복할 수 있다고 강압적인 자기주장만 하고 있다. 뜬 구름 잡듯이 가나안 땅을 점령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 얼마나 세밀한 작전을 세웠는지,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해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면서 여호수아의 지도력이 얼마나 훌륭하게 나타나고 있는지 면밀하게 살펴봐야 할 것이다. 단순히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서 제사장이 언약궤를 앞세워 나간 것이 아니다.
거센 물살을 견디어 내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다 건너가기까지 내리 누르는 언약궤의 무게는 어깨의 통증뿐만 아니라 온 몸에 전해지는 아픔을 견뎌낸 것이다. 구원받기를 원하는 세계 민족들을 온전히 구원하시기 위해 지금도 요단강에 십자가를 메고 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보여 진다면 요단강은 아무나 건너는 것이 아니다.
택해진 자만이 건널 수 있는 것이며 옛 사람이 율법과 함께 죽고 성령으로 새롭게 거듭난 새 사람만이 건널 수 있는 강이라고 한다면 요단이란 이름과 같이 낮아지고 낮아진 곳을 향하여 힘차게 흘러가게 한다는 뜻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낮아지고 낮아져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곳으로 힘차게 흘러가야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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