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뎀나무아래 이야기/로뎀나무 아래

◈ 어설프고 서툴은 것이 더 많은 목사 ◈

로뎀의 엘리야 2007. 2. 18. 10:22

 

 

◈ 어설프고 서툴은 것이 더 많은 목사 ◈

 

나뭇잎 떨어져 뒹굴어도, 그것이 떨어져 썩어 새싹의 소망을 기다림 같이 저의 삶이 그러기를 갈망합니다.
마른 땅에서 샘물을 볼수 있고  쓰레기통에서도 꽃이 피는, 환상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아직 서툰 것이 더 많은 저에게서도, 그런 새싹을 보아 주었으면 합니다.

잘 맞지 않는것 같은 목사라는 옷을 입고 거추장스럽게 살아가는 저에게 그래도 누군가 "목사님같은 분이 존재하여 주심으로 힘이 난다"는 의례적인 격려의 말에 속아주듯 그런 인사듣는 재미로 오늘도 부끄러운 목사의 자리에서, 도망치지도 못하고 이렇게 뻘쭘하게 서있습니다.

참 좋은 목사가 되고 싶었는데...

수 없는 시간들을 울며 불며, 결심하고 힘쓰고 애썼는데도, 잘 안되는 것을 보면 목사라는 옷이, 내게는 영 맞지 않나 봅니다.

옛 노랫말에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마음이 고와야지 여자지...“

요즈음 유행하는 개그 프로에 "뉴스가 뉴스 다워야 뉴스지" 하는 것 처럼 "목사가 목사 다워야 목사지 ! ! !"

  

그렇습니다.
지식이 많고 설교를 잘하고(?), 기도를 많이 한다고, 좋은 목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압니다.
그러기에 뼈가 부셔지는 듯한 산고를, 섬기는 곳에서 예배가 끝난후 마다 치릅니다.

"마음 착하고, 사랑 많고, 포용력 넓고, 부드러워야 좋은 목사라"고 끝없이 되뇌이면서도, 그게 잘 안될때 마다 자괴감을 곱씹어 삼킵니다.

 

슈퍼맨을 요구하는 현대목회에서, 정말 나같은 사람은 영 어색해 보여 하나님 앞에.. 형제 자매(성도)들 앞에, 죄인인듯 합니다.

나도 잘 하고 싶은데, 잘 안되는 것을 어찌 합니까?

 

그래서 보시다 못한 하나님이 저를 불 가운데로 집어 넣으시고, 물 가운데로 지나게 하시나 봅니다.

신학교 시절 저는, 목사가 되면, 반드시 "성도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어야겠다"고 선지 동산을 오를 때면 가슴에 새겼지만 이제는 그것도 빛바랜 사진처럼 퇴색되는것 같아, 서럽기까지 합니다.

그래도 어찌합니까?
내 맘대로 도망칠수도 없는, 하나님의 거룩한 소명이라는 정당성(?)앞에 오늘 하루도, 엉금 엉금 기어가는 심정으로, 이 길을 걷습니다.

 

언젠가는 낙엽이 썩어, 새싹을 이룰 날들을 소망하며... 천번을 넘어지고 만번을 실패하다 보면, 저도 언젠가는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사람처럼 목사라는 옷이, 저에게도 어설프레 맞는 성직이 되어있지 않을까요?

그날 주시기를, 소망할 뿐입니다.

날마다 성도들에게는 죽으라 강조하면서도, 저는 시퍼렇게 살아있고 날마다 성도들에게는 말씀대로 실천하라 요구하면서도 정작 목사인 저는 말씀과 별개인 삶을 살아야 하는 거룩한 위선의 삶을, 하나님 앞에 통절히 쏟아 냅니다.

누구보다도 '설교만 잘하는 목사라는 말'이 '죽으라는 말'보다 싫었던 저이기에 누구보다도 말씀대로 살려고, 고집스럽고 올곧게 실천한 것이 성도들에게는 여간 짐스럽고, 부담되었던 모양입니다.

저도 압니다.
설렁 설렁한 목사가 되어야 함을요. 완전한 분은, 하나님 그분으로 족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흠많고 연약함이, 더 많은 목자에 불과 합니다.
그래도 분명, 저 안에 끓어 오르는 교우들을 향한 사랑은, 어찌할수 없습니다.

그것이 과하여, 때로는 상처가 되기도 하지만요.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베드로를 향하여 "바요나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고 물으신 주님이 아시시라면 저는 벌써 도망갔을 겁니다.

누가뭐라해도 제가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선교지)를 사랑하고, 성도들을 사랑하기에 날마다 부끄러워도, 제 자리가 아닌듯한 이 자리에 버티고 서 있습니다.
언젠가 베드로의 황혼을 꿈꾸면서 말입니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이 변하고 교우들이 아무리 변했다 하지만 그것이 시원치 않은 목사의 리더십에 무슨 변병이 되겠습니다.

오직 더 많이 변해야 하는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지 못한, 목자의 게으름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이제는 어느덧 자타가 공인하듯이, 저의 삶은 제 개인의 것이 아님을 압니다.

그러니 공인으로.. 성직자로.. 한점의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는데.. 목사가 시원치 않아 가난하고 병들어 송구할 뿐입니다.

가난과 질병은 저로하여금 본질을 놓치게 하는 사단의 도구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가시은총이 되어 저를 단련시키기도 하지만요.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지만, 사람은 어디 그런가요?
그러니 반드시, 건강하고 부요해야 좋은 신앙은 아니지만 그것이 없음으로 교우들에게 짐이 된다면, 이제는 건강과 부요함을 위하여도 기도해야 할것 같습니다.

아무리 말씀중심으로 산다 한들, 늘 아프고 늘 가난하다 하면 누가 그 말씀에 영향을 받을수 있겠습니까?
세상에는 사람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평가하는, 고도의 시력을 소유한 자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기에... 시대의 흐름에, 역류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숙하고 완숙한 성도들을 요구하기 전에, 목사인 내가 더 많이 성숙하고 완숙해야 하는 숙제를, 끌어 앉고 삽니다.
"빨리 자고, 다 잊어버리고 아침이 되면 새로 시작하자는"는 식으로 날마다 반복되는 연습밖에는 도리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목사가 로뎀나무 아래서 맥빠지고 죽기를 간구하면 "오죽 시원치 않으면 그러겠느냐" 하겠지만 그 연약함을 알고 부르신 주님은 "오죽 힘들면 그러겠느냐" 감싸 주시는 은혜 때문에 이렇게 용감하게, 오늘도 이 자리에 서있습니다.

주님은 어떤 경우에라도, 목사의 친정 엄마같은 분이시며 저의 단점보다 장점을 보시고, 춤을 추시는 분이시니까요?

 

이 밤도 몸에 맞지 안는 옷을 입고, 좁은 길을 헤집어 가는 저를 위해 눈물로 밤을 지새우시는 어머니와 중보자들이 계시니까 그래도, 저는 가능성 있는 목사이며, 행복한 목자입니다.

내일 아침해가 뜨면 가슴벅찬 일들로, 어제를 잊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내일은 다하지 못하고 잠든 숙제를, 하나라도 풀었으면 합니다.
오늘은 나뭇잎으로 떨어져 앙상한 것 같은 로뎀나무 아래지만, 내일은 새싹으로 돋아나기를 두손 모아 기도드립니다.

 

고린도후서 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