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요한 복음 19장
제목/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한 개인의 억울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온 인류에게 죄의 용서와 하나님과의 화목과 목마르지
않는 평강을 주시기 위한 진통의 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영적인 신분을 가지고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잉태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때문에 교회는 모일 때마다 몸이 찢겨지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십자가의 정신을 본받아야 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러한 숭고한 사랑의 깊이도 모르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영생에 관한 진리를 알지 못하고 육신적인 영달에 눈이 어두워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빌라도입니다.
빌라도는 가장 강대한 나라 로마의 총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옳고 그름은 아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옳고 그름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고 인간의 평판이나 시선을 의식한 사람이었습니다.
18장 38절에서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고 자신의 입으로 주님의 무죄함을 말했음에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했던 사람입니다.
본문
10절에서 빌라도는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고 오만하게 말했습니다. 마치 자신의 지위가지고
사람의 생명을 마음대로 주관할 수 있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빌라도는 로마 황제 가이사의 권세를 두려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보다 가이사를 더 무서워했기 때문에 사악한 군중의 요구하나 무마시키지 못하고 무죄한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했던
기회주의자였습니다.
지도자는 누구를 두려워해야 합니까? 사람을 무시해서도 안되지만 사람의 기분을 맞추고 사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4절에 보면, "사람을 기쁘게 하려함이 아니요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나라가 바로 서고 공평한 정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둘째는, 유대인들의 불신앙과 무지입니다.
구약의 바로나 아합은 하나님께 돌이킬 수 있는 은혜의 기회들을 강퍅한 마음 때문에 모두다
놓쳐버리고 망한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6절에 나오는 대제사장과 하속들도 바로 그런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유대의 지도자이며
경건하다고 말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적인 자만과 세속적인 욕망이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그리스도를 신성모독 죄를 적용시켜서
십자가에 못박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죄가 얼마나 큰 죄입니까?
예수님은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고 했습니다(11).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한 것 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죄가 더 크다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어차피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는 이방인 불신자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 종교지도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스스로 하나님을 가장 열심히, 가장 경건하게 섬기는 자들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는 결코 작지 않은 죄입니다.
셋째는, 악한 자들의 적극적인 방해에도 주님은 하나님의 뜻하신 바를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악한 자들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허무하고, 하던 일도 유야 무야 되어버리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는
것에서부터 수치와 모욕과 창에 찔려 죽임을 당하는 이 모든 것이 그냥 되어진 것이 아니라 성경에 예언된 대로 성취된 것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주께서 참 하나님이셨다는 증거는 십자가상에서 집중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다리가 부러지지 않은 것도, 예수님의 옷을 나눠 가진
것도, 그리고 예수님께서 금요일에 십자가 처형을 당한 것도 그렇습니다.
십자가 처형법을 시행하는 로마법은 범죄자의 시체가 십자가에서 다
썩을 때까지 그냥 방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시신이 안식일까지 십자가에 매달려 있게 된다면 신명기 21장 22절대로 율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는지 31절에 보면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요청을 했습니다(31).
넷째로, 이렇게 성취된 것 중에 가장 큰 성취는 죄인의 구원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를 죄악가운데서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악한 자들의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본문에 두 사람의 모델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38절에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성경은 그를 부자라고 했고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다고 했습니다(마27:57, 막15:43).
주님께서 살아계셨을 때는 종교지도자들이나 유대 관원들을 의식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고백을 하지 못했지만, 주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이후에 그 되어진 모든 일을 통해서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주를 위해
헌신 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39절의 니고데모입니다.
니고데모는 아리마데 요셉이 주님의 시신을 새 무덤에 안치할 때
동참했던 유일한 사람입니다. 전에 밤중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예수님께 왔던 사람이었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예수님의 무죄성을 증거했던
사람입니다(요7:51)
그러나 이제 니고데모는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예수님의 시신에 향을 준비해 왔습니다.
아리마데 요셉과 니고데모의
용기 있는 신앙과 헌신으로 예수님의 몸에는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향품이 채워졌습니다.
한번도 장사지낸 일이 없는 새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되었습니다.
변화된 성도만이 주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헌신하는 성도가 있을 때 그리스도의 영광은 이 땅에 우리가 사는
동안에 영광 받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이 사순절 기간에 새롭게 변화되시고 그 새로움으로 주를 위해서 헌신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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