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웃고 있는 얼굴 뒤에, 울고 있는 내가 있다 ◈
태양이 비추이는 청명한 날에도, 그늘은 있게 마련이다.
아름다운 장미 나무에도, 찌르는 가시가 있음을 본다.
그렇듯이 밝고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 뒤엔, 울고 있는 또 다른 내가 있다.
어쩌면 많이 밝아 보일수록, 많이 울고 있는 것이며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뒤엔, 피눈물을 흘리는 내가 있음을 느끼며 놀랄때가 많다.
가롯유다는, 사랑하는 선생님을 입맞춤으로 배신하였다.
이것은 타락한 본성을 소유한 사람만이 할수 있는, 위장의 능력이다.
강아지는 슬프면 울고, 기분좋으면 꼬리를 흔들어,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한다.
그러나, 사람은 슬퍼도 기쁨으로 위장하고, 기뻐도 슬픈 척을 할 수 있다.
영적인 삶도 다르지 않다.
분명 충만하지 않은데, 세련되고 화려한 포장으로 충만하지 않음을 대신하려 한다.
분명 영이 아닌데, 영적인 용어를 사용하며 영적인 갈망을 표출하여, 영적인 사람인듯 착각하게 코팅하려 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예배도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받으신다.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상당수의 크리스쳔들이, 영이 아닌 혼의 잠재력으로 영을 대신한다.
예를들어 봉사나 헌신이나 섬김은, 영이 흘러 넘칠때 저절로 이루어지는 열매이며 결과이다.
봉사나 구제를 했다고,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배도 마찬가지다.
나의 삶을 비우고, 자아를 십자가에 못밖고, 드려질때, 그 예배를 받으시고 그 예배를 통해, 축복과 위로와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는, 얼마나 익숙하며 타성에 젖어 있는가?
정확히 표현하자면, 예배드렸음으로 영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영의 사람이 드리는 예배가, 진정한 예배라는 말이다.
놀라운 사실은, 혼의 잠재력으로도 얼마든지 죽도록 충성이 가능하고, 헌신이나 섬김도,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영이 아니면, 안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충성과 봉사자체를 영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느냐'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인가'를 먼저 물으신다.
하나님의 임재없이도, 수십년 교회생활이 가능하고 목회도 선교도 가능할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삶은, 하나님과는 무관한 것이다.
그런 섬김은, 가인의 예배와 같은 것이다.
그러면 혼인가 영인가를 어떻게 구분하는가?
간단하다.
저절로 되거나,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면, 영이고 억지로 하거나 자기만족을 위하여 하면, 혼의 잠재력이다.
이제 우리는, 나의 예배와 봉사와 섬김이 혼에서 출발한 것인지 영의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인지를 점검해야 한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인 예배와 삶 뒤에, 혼의 잠재력이 숨어 역사하듯이 웃고 있는 상당수의 얼굴 뒤에는, 울고 있는 또 다른 내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진짜 나는, 속사람이다.
속사람은 병들고, 슬프고, 우울하고, 어둡고, 상처나고, 쓴뿌리로 가득한데 그것을 감추기 위해 우리는, 부단히도 노력한다.
마치 얼굴의 흉터를 화장으로 가리듯이 말이다.
우리는 부드러운 미소로 형제를 미워하고, 밝은 얼굴로 형제들을 정죄하고 포옹으로 형제에게 칼을 들이댄다.
그리고 군중속에서의 나와 홀로있을 때의 나는 다르다.
어쩌면 우리는 두집 살림을 사느라, 지쳐 있는지 모른다.
군중속에서는 명랑하고, 사랑 많고, 다정다감하고, 신령한 사람으로 철저히, 자신도 모를만큼 위장하고 포장한다.
그러나 사실은 내면 깊은 곳에는 바다만한 분노와 상처와 원망이, 시한폭탄처럼 출렁이고 있다.
그래서 교회서는 성자로 세상에서는 탕자로, 살아가는 독특한 삶의 방식의 노하우를 터득하여 삶을 영위한다.
마치 능력도 안되는데,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폼(?) 잡느라,
실제로는, 하루 세끼 걱정에 궁핍한 졸부처럼 말이다.
'빈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이 있다.
속이 텅빌수록, 시끄럽다는 말이다.
사람도 그렇다.
속이 꽉찬 사람은, 별말이 없다.
요동도 없다.
불행하고 힘들다고, 소란을 피우지도 않는다.
그러나 속이 텅빈 사람은, 텅빈 속을 가릴려고 별 방법을 다~ 동원한다.
우선 지나치게 화려한 옷으로 치장을 하고, 분수에 넘치는 명품으로 텅빈 속을 포장한다.
마치 힘없고 약한 물고기일수록 화려하게 보호색을 띠듯이..
이런 사람의 하루는, 천년같이 고단하다.
잔머리를 쓰며 처세술에 분주하다 보니, 예수도 그런식으로 믿으려 한다.
혼이 강한 사람들일수록 순수함이 결여되기도 하고, 영의 진입이 어렵기도 하다.
하나님은 순수한 사람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신다.
하나님은 간사함을, 아주 싫어 하신다.
하나님은 혼으로 접근하려 하면 할수록, 더 멀리 숨으신다.
이제는 울고 있는 진짜 나를, 하나님 앞에 드러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무엇을 가리며 숨기려 하는가?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라.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라.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 달라고 요청하라.
죽고 싶으면, 죽고 싶다고 말하라.
기도가 안되면, 안 된다고 시인하라.
믿음이 없으면, 안 믿어진다고 고백하라.
슬프면 웃지 말라.
슬프면 울어라.
화장을 지운 여인의 모습처럼. 하나님 앞에서도 화장을 지우라.
그리고 혼의 잠재력을 십자가에 못밖고, 영력을 소유하라.
철저히 오랜세월 동안 타성과 익숙함으로 코팅된 당신의 영성을 벗겨 내고 순수하고 신선한, 새 사람을 입으라.
겉은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속은 솔로몬의 휘장과 같은 사람이 되라.
겉은 솔로몬의 휘장 같은데. 속은 게달의 장막 같으면 당신은 망한다.
웃고 있는 당신의 모습 뒤엔. 물밀듯 기쁨으로 충만한 또 다른 나를 잉태하라.
무조건 참지 마라.
참는것은 혼이다.
참아지는 것이 영이다.
영력과 혼의 잠재력을 혼돈하지 말라.
소는 뿔이 있지만. 뿔이 있다고 다 소는 아니다.
혼으로도 예수를 잘 믿을수 있고, 목회도, 사역도, 가능은 하지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영적인 것이다.
더디가고, 멀리가고, 오래 걸려도, 영의 길을 선택하라.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것'이 아니다.
'모로 갈바에야 서울 가는것을 포기해야' 한다.
사는 것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
카타콤 같은 동굴에 살던, 라면으로 주식을 삼던, 별 생명에는 지장 없다.
'행복지수'나, '감사지수'와도 무관하다.
그러나 예수는, 아무렇게나 믿으면 큰 일 난다.
제대로 믿어야 한다.
제대로 믿는 길은 내게 속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 일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이, 성령의 힘이며 진짜 은혜이다.
이제는 웃고 있는 얼굴 뒤에, 울고 있는 나의 삶을 청산하고 웃고 있는 얼굴 뒤에, 주님이 계심을 만민이 알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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